삼일절과 숭고한 민족정신
2023년 3월 4일
해마다 3.1절이 되면 늘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일제 치하에서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가일층 놓이며 나라 사랑과 민족 사랑을 삶의 현장과 옥중에서까지 몸소 보여주었던 유관순 열사입니다. 유관순 열사(1902∼1920)는 충남 천안시 병천면의 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좋은 믿음의 길잡이가 되셨던 조부 유윤기로 인해서 기독교인의 집안이 되었으며 부모님 류중권 이소제의 가정 둘째 딸로 태어난 유관순도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앙의 가정 속에서 기독교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유관순은 1918년 3월 18일 이화 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1일 고등과 1학년에 진학했습니다. 미션 스쿨의 나라 사랑 기도회와 애국애족 운동은 열사의 마음에 애국심과 함께 참된 신앙인의 열정을 불어넣었습니다.
1919년 3·1절 만세 운동이 탑골공원에서 일어난 이후 학생들의 시위가 극심해지자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3월 10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렸으며 그 결과 유관순도 더 이상 학교에 머물지 못하고 고향 천안으로 기차를 타고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기차 안에서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던 친구들이 말하기를 기차 소리가 “‘동전 한 푼, 동전 한 푼’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웃으면서 말을 하자 유관순의 대답 하기를 “‘대한 독립, 대한 독립’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말을 했다는 의미심장한 일화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유관순은 고향 천안 병천으로 돌아와 지역 주민들과 함께 아우내 장터에 모여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게 되었으며 그때 부친 유중권은 일제 헌병의 무자비한 총검에 찔려 숨을 거두게 되었고 유관순은 왜경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됐습니다.
징역 3년 형을 언도 받았으나 그 이후 법정모독죄가 추가되어 7년 형으로 늘어나고 교도소 안에서도 시위 계획을 세우다가 발각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일제의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1920년 9월 28일 결국 순국하게 되었습니다. 유관순의 옥사 소식을 듣게 된 이화 학당의 학생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가족들과 고향 사람들이 시신의 인도를 요청하였지만, 일제는 자신들의 잔악하고 불의한 고문 사실이 드러날까 봐 인도를 거부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하게 된 이화 학당의 프라이 교장은 국제 여론에 호소하며 시신 인도를 끈질기게 요구한 끝에 간신히 시신을 넘겨받게 되었는데 그렇게 돌아온 시신은 아주 끔찍하게 손상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10월 12일 시신을 넘겨받게 된 가족들과 지인들은 이틀 뒤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사의 조촐한 천국 환송식을 거행하게 되었고 시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하게 되었습니다.
유관순이 일제의 불의한 재판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 안에서 모진 고문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비굴한 행동을 하지 않고 기독교인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외치며 조선인의 자긍심을 가지고 일본 재판관들과 당당하게 맞섰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일본인 재판관들을 향하여 당당하게 대항하기를 “나는 당당한 대한의 국민이다. 대한 사람인 내가 너희들의 재판을 받을 필요도 없고, 너희가 나를 처벌할 권리도 없다.”라고 항변했으며, 일본 재판관이 재판을 끝내려 할 때 마지막 남긴 말이 이렇습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나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빼앗긴 고통만큼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18세의 어린 소녀로 나라 사랑과 민족의 자긍심을 당당하게 드러낸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삶은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합니다.
또 한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안중근 의사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권총 세 발을 쏘아 명중시킨 후에 만세를 부름으로 그 현장에서 도망가지 않고 스스로 체포됐습니다. 안 의사는 여순감옥으로 옮겨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재판받았고,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가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사형당한 바 있습니다. 이때 안중근의 나이는 31살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는 아들의 사형선고 소식을 듣고 짧고 단호한 의지를 나타내는 편지를 아들에게 보낸 바 있습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정말 자랑스러운 어머니의 결단을 숭고한 신앙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이 편지에 대하여 여순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던 안중근 의사가 보낸 유서와 같은 편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불초한 자식이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 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 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現世)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있으니 마음을 편안히 하옵기를 천만번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안 의사의 장남)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시길 희망하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시옵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주십시오.”하고 편지를 이어 가면서 마지막 부분에서 덧붙이기를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이 나라 이 민족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초개와 같이 버리신 신열들의 숭고한 삶의 결단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이렇게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빼앗긴 이 한반도를 되찾기 위해 맨몸으로 일제를 향하여 항거하셨던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뜻이 헛되지 않기 위하여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국민들 역시 애국애족의 참된 나라 사랑의 정신을 가지고 바른 민족의 이상을 꽃피워 가는 존귀한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삼일절 104주년을 맞이하여 순국선열들에게 깊이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리며 이 땅에 뿌리신 그 피와 눈물과 숭고한 정신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